요즘 읽은 것들

요즘 읽은 것들

지난 글에 이어서, 요즘 읽은 글들을 소개합니다. 근데 글의 내용을 직접 소개하지 않고, 이 글들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을 써보려고 해요.


들어가기 앞서, 저의 2021년 1분기 OKR 중에 이런 게 있었습니다.

Objective: 인재들이 찾는 회사 만들기
- Key Result: 채용 브랜딩 담당자 채용하기
- Key Result: 노션 채용페이지를 ‘*****보다 낫다' 점수 5점 이상 되게 만들고, 노션을 통한 지원서 50개 이상 받기
- Key Result: 모든 구직자 접점을 노션으로 몰아주고, 안 쓰이는 페이지 폐쇄하기
- Key Result: 일주일에 한 번씩 긴 글을 써서 블로그/미디엄 링크를 슬랙에 공유하기

위의 KR 중 첫 세 개는 정말 성공적(인 free-riding)이었습니다. 입사하자마자 넘사벽의 퍼포먼스를 보여준 채용 브랜딩 담당 팀원 도영이 덕분입니다. 어디에도 없는 디어만의 고유한 색깔을 다양하고 재밌는 방식으로, 혼자서,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만들어낸 것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얼마 전에는 ‘잘 나가는 스타트업들의 채용 브랜딩(링크)에 디어가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디어가 여기에 소개되었어요!

디어 채용 홈페이지 구경하기 (링크)

문제는 네 번째 KR인데, 이건 실패했습니다. 일주일에 짧은 글 한 편 쓰는 게 생각보다 엄청 오래 걸리더라고요.

그렇게 고생하다가 나름 제가 찾은 요령은 ‘읽은 것을 짜깁기하기’인데요, 이미 있는 재료를 갖고 글을 쓰면 많이 쉬워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을 감안해서 읽어주세요 :)

읽은 것들
1. [The Generalist] Arthur Rock: Silicon Valley’s Unmoved Mover (링크)
2. [HBR] How Facebook Tries to Prevent Office Politics (링크)
3. [Pulse] Operations and Internal Communication Strategies For Effective CEOs (링크)
4. [Know Your Team] How to onboard a new hire remotely (링크)
5. 벤저민 하디 — 최고의 변화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6. [The Generalist] Coupang: The Art of Obsession (링크)
7. [Platform Chronicles] Product to Platforms (Part I~IV) (링크)
8. 애덤 그랜트 — 오리지널스 (명균 추천책)

위의 글들을 읽으면서 느낀 점들이 정말 많은데요, 그 중 이번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테마는 ‘영리하게 진화하기’입니다.

영리하게 진화하기 (Smart Evolution)

스타트업은 0에서 1로, 1에서 10으로, 10에서 100으로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성장의 각 단계가 직전 단계보다 조금 더 큰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세계가 됩니다. 그래서 진화라는 단어가 어울립니다.

디어의 진화를 보면 성장의 각 단계가 얼마나 큰 차이를 보이는지 알 수 있습니다.

2019년 1분기(2년 전) : 앱도, 킥보드도 없던 시절입니다. 당연히 유저도, 매출도 없었고요. 그리고 저를 비롯한 창업 멤버들이 아직 회사에, 군대에, 연구실에 있던 시기였습니다. 누구에게도 디어가 전업이 아니었던 시절이죠.

2020년 1분기 (1년 전) : 놀랍게도 불과 1년 전인데 아직도 반지하 하숙집에서 파이팅하던 시절이네요. 헝그리 정신, garage startup이라는 말로 많은 부족함이 용서되었던 때입니다. 당시 디어는 1천 대 정도의 킥보드를 운영하면서, 1호 가맹점인 인천의 안정화를 마무리해가고 있었습니다.

최근 1년 사이 디어는 매출, 회원 수, 지역 수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10~20배 성장을 했습니다. 그 사이 공장과 새 사무실도 생겼네요.

이렇듯 스타트업에서 1년은 약간의 성장이 아닌 진화를 위한 시간입니다. 하던 일을 좀 더 잘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새로운 것을 계속해서 시도해야 합니다.

이제 다음 1년 동안 어떻게 진화할지 고민해보아야 하는데요, 저는 위에 소개한 글들을 읽으면서 진화도 ‘알고 하면 더 잘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리하게 진화하기’라는 주제를 선정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디어의 진화 방향성은 크게 네 가지입니다.

1. 고객의 불편함을 제거하는 것에서, 고객의 삶을 바꾸는 것으로의 진화
2. 더 깊은 WHY로의 진화
3. 플랫폼으로의 진화 또는 그런 잠재력을 가진 서비스로의 진화
4. 재무적 진화

  1. 고객의 불편함을 제거하는 것에서, 고객의 삶을 바꾸는 것으로의 진화

흔히 문제 해결(Problem Solving)이라고 하면 불편함을 찾고, 그것을 제거하는 과정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는 문제 해결의 다양한 종류 중 한 가지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나이키, 코카콜라, 디즈니가 불편함을 제거해주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에 의미 있는 변화를 주었기 때문에 ‘팬으로서’ 사랑하는 것이지요.

이외에도 세상을 바꾼 혁신들 중에는 ‘불편함을 제거하자’라는 생각에서 출발하지 않은 것들이 많습니다.

가령 마차가 불편해서 자동차를 만들고, 어둠이 불편해서 전기로 불을 밝히고, 비둘기로 편지를 띄우는 게 불편해서 전화기를 만든 게 아닙니다. 기술이 점진적으로 발달하는 과정에서 누군가 자동차로, 전기로, 전화기로 인해 사람들의 삶이 통째로 바뀔 것을 내다본 것이죠.

물론, 우리 주변의 불편함(Pain Point)을 찾고 그 지점에서 사업을 출발하는 것은 초기 스타트업에게는 정말 유용한 방법론입니다. 자원이 많지 않은 스타트업은 PMF(Product-Market Fit)를 찾는 데 실패할 확률을 최소화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불편함을 제거하는 서비스는 수요가 어느 정도 검증돼 있기 때문에, 스타트업의 실패 확률을 줄여줍니다. 삶 속의 작은 불편함들을 찾아서 니치(niche)한 수요를 충족하고, 이렇게 작은 시장을 정복한 후 점점 영역을 넓히는 것이 린 스타트업의 핵심입니다. 피터 틸의 <제로투원>이나, 신디 앨버레즈의 <린 고객 개발>이 이런 내용을 아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디어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수요 검증을 하는 단계를 지났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상대적으로 초기 스타트업에 비해 자원이 풍족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국에 유통망이 있고, 공장이 있고, 중국 거래선이 있고, 경험이 있고, 현금 흐름이 있고, 기타 등등 여러 자원들이 있습니다.

전국 확장을 통해 많은 경험을 쌓은 디어

따라서 이제 디어는 불편함을 찾고 그것을 제거하는 확률 높은 전략에 의존하기보다는,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거대한 변화에 도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심부름꾼 같은 자세로 고객들의 불편함을 제거하고 칭찬을 받기보단, 선구자의 자세로 고객들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보여줌으로써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불편함을 제거하는 서비스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안하는 서비스로

2. 더 깊은 WHY로의 진화

해결하는 문제의 크기가 커짐에 따라, ‘우리가 일을 하는 이유’도 진화해야 합니다.

지엽적이고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할 때는 1차적인 WHY로도 목적 의식을 고취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디어는 초창기에 ‘24시간 킥보드를 탈 수 있게 하자. 끝내주게 좋은 UI/UX로!’라는 문제 의식(1차적 WHY)이 있었습니다.

24시간 킥보드를 탈 수 있게 하자.
끝내주게 좋은 UI/UX로!

이 때는 편리한 공유 킥보드 서비스를 만들겠다는 생각만 있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을 고민 끝에 저희 팀이 국내 최초로 24시간 서비스를 출시하였습니다.

디테일도 많이 신경썼습니다. 예를 들어 디어는 이용자들이 코드를 직접 입력할 때 키보드를 치기 불편할까 봐 킥보드의 UID를 숫자 네 자리로 만들었습니다.

어떤 자판이 더 편해보이시나요?

그것도 모자라, 킥보드의 UID를 0000부터 순서대로 나열하거나 UID 간 간격을 50 같이 딱 떨어지는 숫자로 하면 0050이나 0100을 0150으로 잘못 누를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으로 숫자 간격을 49로 만들었습니다. (0001, 0050, 0099, 0148, 0197, … 숫자가 이렇게 증가하면 잘못 누를 일이 별로 없지요.)

이렇게 지엽적이고 구체적인 WHY는 목표를 선명하게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좋은 도구가 됩니다. 하지만 이런 WHY는 언젠가 한계에 부딪힙니다.

‘우리가 풀고자 하는 문제에 대해서, 디어보다 더 좋은 해결사가 나타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좋은 대답을 주지 못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볼게요. 구글 본사가 있는 마운틴 뷰에서는, 구글이 무료로 설치한 자전거를 시민들이 제한 없이 타고 다닐 수 있습니다. 아무 데나 반납할 수 있는 Free Floating 방식이고요.

누구나 탈 수 있는 Google Bikes

마운틴 뷰에서는 단거리 이동에 관한 문제 해결(1차적 WHY)을 디어보다 구글이 더 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문제 해결을 디어보다 더 잘할 수 있는 회사가 있다면 양보해주어야 합니다. 아니면 경쟁하든지요. 이렇듯 1차적 WHY는 회사를 비교와 경쟁의 프레임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만듭니다.

2차적 WHY

소모적인 경쟁에서 탈피하고 깊은 의미를 추구하려면 2차적 WHY가 명확해야 합니다. 2차적 WHY는 1차적 WHY에 대해서 한 번 더 ‘왜’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소 개인적일 겁니다. 훌륭한 동료들에게 둘러쌓여 있다는 소속감, 사회에 큰 가치를 기여하고 있다는 사명감, 내부 경쟁에서 승리하고 인정 받는 자부심, 한 명의 인간으로서 지적/업무적 성장을 할 때 느끼는 뿌듯함, 보상에서 오는 성취감 등이지요. 즉 2차적 WHY는 내적 동기입니다.

2차적 WHY는 내적 동기다

독자 여러분에게 일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3. 플랫폼으로의 진화 또는 그런 잠재력을 가진 서비스로의 진화

Core Product가 강한 회사는 플랫폼으로 진화할 잠재력을 갖게 됩니다. 유저가 많아지면, 다음 세 가지 특징이 나타납니다. (1) 유저에의 접근을 원하는 외부자가 생기고, (2) 유저들 간의 상호작용을 일으킬 수 있게 되고, (3) 유저들이 보유한 유저들의 고객들(고객의 고객)에게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 중 (3)번은 디어에게는 아직 해당사항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아는 플랫폼들 중 많은 것들이 Product로 시작해서 플랫폼으로 진화했다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아이폰은 처음에는 자체 앱만 탑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스마트폰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워낙 많아서, 외부 개발팀들(3rd party)에 API를 제공하고 어느 개발자라도 아이폰에 탑재할 수 있는 앱을 만들어 판매할 수 있도록 앱스토어를 만들었지요.

세일즈포스도 처음에는 클라이언트를 위한 CRM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는데, 시간이 지난 후 이런 소프트웨어를 직접 만드는 것보다는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훌륭한 개발자들이 다양한 앱을 만들 수 있도록 장터(marketplace)가 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Salesforce AppExchange라는 앱스토어를 만들었습니다.

세일즈포스에서 만든 앱스토어, AppExchange

디어도 현재는 Core Product를 고객들에게 일방향적으로 제공하고 있는데요, 연내 월간 결제자 수가 50만 명이 넘을 것이라고 생각해볼 때 위에서 말한 방법들을 통해 플랫폼으로 나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요?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고민해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자극이 될 것 같습니다 :)


4. 재무적 진화

끝으로, 재무적 진화가 필요합니다.

사업의 목적이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자’라는 것이라면, 사업의 방식은 ‘투자와 회수의 반복’인 것 같습니다. 투자 대상은 주로 시간과 돈이고, 회수 대상도 시간과 돈입니다.

돈으로 시간을 살 수도 있고, 시간을 들여서 돈을 아낄 수도 있습니다. 시간을 조금 들여서 시간을 많이 벌 수도 있고, 돈을 조금 들여서 돈을 많이 벌 수도 있습니다.

고객에게 집착하고 좋은 서비스를 만드는 것만큼, 인사/채용도 중요하고, 재무/회계도 중요하고, 법무도 중요하고, 대외협력도 중요합니다. 아래 소개드리겠지만 ‘고객 집착’을 외치는 대표적인 선배 기업들조차 재무적인 판단이 우선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리콘 밸리의 전설(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안 알려진 투자자) Arthur Rock은 투자 대상을 고를 때 ‘사람’을 많이 봤다고 합니다. 그리고 ‘투자할 만한 사람’은 아래 기준으로 골랐다고 하지요.

Integrity
Motivation
Market-oriented (the desire to sell)
Skills and experience
Accounting ability (understanding of financial levers)
Leadership

Market-oriented와 Accounting ability를 우리말로 바꾸면 각각 ‘장사꾼의 기질’과 ‘돈의 흐름을 이해하는 능력’ 정도일 수 있겠네요. 훌륭한 창업가의 자질이 비전과 진정성이기만 한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객 집착”을 외치는 순간에도 다른 것들을 함께 고려하는 모습은 아마존과 쿠팡, 애플을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는 초기부터 ‘Free Cash Flow(순현금흐름)’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아래 내용 중 재무적인 개념을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Our ultimate financial measure, and the one we most want to drive over the long-term, is free cash flow per share. Why not focus first and foremost, as many do, on earnings, earnings per share or earnings growth? The simple answer is that earnings don’t directly translate into cash flows, and shares are worth only the present value of their future cash flows, not the present value of their future earnings.

- 2004년 아마존 주주서한 중

위 주주서한을 보면 베조스는 리더로서 고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신만큼이나 재무 지식도 잘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쿠팡은 그루폰 모델로 운영을 하던 당시 매출액보다 고객 획득 비용이 더 높다는 것을 깨닫고 이베이 모델로의 피봇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Even though Coupang was “winning” the daily deals battle, Kim soon had a realization. This was one that many operators in the category eventually understood (including one of this briefing’s analysts who ran such a business): it’s a lousy business model. To earn $1 in revenue, companies had to spend more than that acquiring customers and merchants.

Kim recognized this quicker than most, pivoting the business to become an eBay-style marketplace in 2013.

- Coupang: The Art of Obsession 중

현금 흐름에 집중하거나 피봇을 결정하는 것은 일견 고객을 배신하고 비전을 타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래 메일은 스티브 잡스가 출판사에 e-book 가격 제안을 하는 메일인데요, e-book을 유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개선한 이면에는 이윤에 대한 고민과 협상의 과정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book과 관련한 스티브 잡스의 협상이 담긴 메일. 어떤가요?

이렇게 디어 팀이 함께 고민해볼 만한 네 가지 진화를 나열해보았는데요, 앞으로 1년 동안 디어 팀이 어떤 방향으로 진화를 하게 될지 궁금합니다!

오늘 글이 너무 길어서 여기서 뚝 잘라야 할 것 같습니다.

B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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