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생각들

최근 생각들

안녕하세요,

오늘은 제가 최근에 읽은 글들, 최근에 본 영화 등 최근 경험을 공유해보려고 합니다. 각각의 경험을 회고하는 과정에서 그것들을 연결하는 생각의 줄기가 드러나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


  1. Credit Suisse — Measuring the Moat (링크)

이 글은 73쪽에 달하는 방대한 리포트인데요, 투자자의 관점에서 좋은 회사를 찾는 방법을 안내하는 글입니다.

투자자의 관점에서 사업을 바라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는 사업에 대해 콩깍지가 씌는 것을 방지해주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내가 사랑하는 사업이라도, 투자자의 시각에서는 하나의 투자 대상에 불과합니다.

물론, 회사를 운영하는 목적에 따라서 투자자의 시각을 대입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가령 100년 전통을 가진 초밥집을 운영하는 장인, 한 도시를 대표하는 축구팀, 찐 아티스트들로 이뤄진 힙합 레이블은 설령 법인의 형태를 띠더라도 스스로를 회사라고 규정하지 않을 수 있겠지요.

디어의 경우에는 디어가 성장할 수 있도록 금전적으로 지원해준 투자자들이 많이 있기도 하고, 이제까지보다 더 큰 성장을 하기 위해 앞으로도 투자자들과 교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투자자들이 사용하는 ‘평가 방법론’에 기반해서 디어를 되돌아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어떤 투자자들의 ‘평가 방법론’에 우리 자신을 비춰볼 것인지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저는 디어를 세울 때 ‘워렌 버핏이 좋아할 만한 회사’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피터 틸, 일론 머스크가 좋아할 만한 회사는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이고, 소프트뱅크, YC가 좋아할 만한 회사도 전혀 다른 모습일 것입니다.

스타트업과 워렌 버핏은 일견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긴 한데요, 저는 워렌 버핏을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그의 기준을 통과한 회사는 문화적, 재무적으로 건강한 회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워렌 버핏의 시각에서 회사를 바라보는 것을 선호합니다.

이 워렌 버핏이 소개한 개념이 ‘경제적 해자’인데요, 경제적 해자는 다른 글에서도 소개한 적이 있듯 회사의 경쟁 우위를 지속하게 해주는 방어막 같은 것입니다. 제가 소개한 Credit Suisse 리포트는 이름 그대로 ‘경제적 해자를 평가하는 방법’을 담고 있는데, 이것을 바탕으로 디어를 평가해보고 싶었습니다.

Credit Suisse의 리포트는 마이클 포터,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워렌 버핏 같은 경영의 구루들을 비롯해 게임이론, 평균회귀이론, 통계까지 인용해가면서 ‘이 회사가 경제적 해자를 갖고 있는가’를 판단하는 기준을 설명해줍니다.

읽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아직도 다 못 읽었지만, 인상 깊은 내용들을 현재 수준에서 정리해서 공유해봅니다.

“지속 가능한 가치 창출을 분석할 때 올바른 시작점은 ‘산업’이다.”

“회사의 성장은 그 회사가 자본 조달 금리보다 높은 RoI를 만들 때만 가치를 창출한다.”

“운의 영향을 받는 모든 것은 평균 회귀 효과를 경험한다.”

“경제적 해자는 거의 언제나 불안정하다.”

“피터 린치에 따르면 투자자들은 어느 멍청이(idiot)라도 운영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사업에 투자하는 게 좋다. 왜냐면 조만간 어느 멍청이가 그 사업을 운영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분석 단위는 사업부가 적절하다. 특히 다양한 산업군에서 여러 사업을 하는 회사의 경우 그렇다.”

“일반적으로 시장점유율 변동이 적은 산업의 수익성이 더 높다.”

“워렌 버핏에 따르면 사업을 평가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가격을 결정하는 힘이다. 가격을 10퍼센트 인상하기에 앞서 기도 시간을 가져야 한다면 당신은 끔찍한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구매자로서 공급자에 대한 협상력을 가지려면 (1) 구매자 수가 적거나 (2) 다른 공급자로 전환하는 게 쉽거나 (3) 공급자에 대한 정보가 많거나 (4) 대체재가 있거나 (5) 구매자의 사업에 있어 이 공급이 딱히 중요하지 않아야 한다.”

“시장에 신규로 진입하는 회사들(도전자들)은 사업이 실패할 확률(기저율)을 간과하기 때문에 성공을 과신하게 된다.”

기저율 오류가 뭘까요? 기저율 오류를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암 진단' 예시(링크)를 참고하세요!

“기차 산업은 선로가 특정 경로에 국한되므로 신규 진입자에 대한 기존 업체들의 저항이 격렬한 반면, 비행기는 경로 수정이 자유로워 저항이 덜하다.”

“규모가 커짐에 따라 원가가 절감되는 정도가 클수록 신규 진입의 유인이 낮아진다.”

“학습 곡선도 신규 진입을 저지한다. 누적 생산량이 두 배가 될 때마다 단위 원가는 20% 줄어든다.”

“철수 비용이 높은 산업은 신규 진입이 적다.”

“사업자들은 제품 개발에 걸리는 시간을 과소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경쟁자 간 조율은 이익의 총량을 높인다.”

“수요가 오락가락하는 산업에서는 경쟁자 간 조율이 어렵다.”

“혁신은 종종 소비자들이 필요로 하는 수준보다 (과도하게) 빠르다. 이 경우 제품의 성능보다는 speed-to-market(확산 속도)이나 유통의 유연성이 경쟁력이 된다.”

“외주는 CapEx 절감과 확산 속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만, 성장 단계의 시장에서는 end-to-end 통합이 안 될 때의 비용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외주를 맡기면 실패할 수 있다. 외주를 너무 빨리 시작하면 위험하다.”


2. Molly’s Game + 몇몇 유튜브 영상들

<Molly’s Game>은 Molly Bloom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한 넷플릭스 영화입니다. 정말 재밌게 보았는데요, 운동 선수였던 Molly Bloom이 작은 포커판에서 시작해 점점 더 거물(?)이 되어가는 스토리를 담고 있습니다.

Molly가 운영하는 포커판은 비밀리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작지만 거대한 판이라는 아이러니한 수식어가 잘 어울립니다.

이 포커판의 스케일(판돈이나 참석자의 영향력)이 어찌나 컸던지, 이 곳에는 맷 데이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같은 헐리우드 스타도 있었다고 하지요. 더이상 얘기하면 스포일러가 될 테니 여기까지만 소개할게요 :)

주말에 보기 좋은 영화 <Molly’s Game>

저는 포커도 좋아하고, 영화도 좋아하고, 자서전도 좋아하기 때문에 영화가 정말 재밌었습니다.

포커는 장기적 시각을 갖게 만드는 매력이 있습니다. 이번 판을 이기든 지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오늘 집에 돌아갈 때 처음보다 돈이 많은지 적은지가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오늘 집에 돌아갈 때보다, 몇 달 뒤의 잔고가 중요합니다. 즉 긴 시간 동안 지켜보았을 때에야 의미 있는 추론에 근접할 수 있습니다.

포커처럼 운이 작용하는 경우에는 한 판을 두고 승패의 원인을 분석하면 안 됩니다. 이럴 때에는 운의 효과를 최대한 배제하기 위해서 많은 판을 확보해야 합니다. 대수의 법칙이 성립해야 패턴이 보인다는 것이죠.

프로 포커 선수 임요환이 나오는 유튜브 영상(링크)에도 비슷한 얘기가 나옵니다.

“포커 선수는 1년 정도 봐야 한다. 한 번의 토너먼트에서 떨어졌다고 실력이 없다고 할 수 없다. 포커는 데이터베이스가 오랫동안 쌓여야 하는 게임이다.”

Molly’s Game에서는 반대로, 한동안 포커를 잘 치다가 마지막에 한 번 삐끗해서 인생을 망친 사람이 등장합니다.

회사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어느 회사가 오늘 현재 잘 나간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그 회사가 좋은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것은 어려운 것 같습니다. 대우, 해태 같은 기업들은 지금은 잊혀졌지만 한 때의 위용은 대단했습니다. 문제는 이 기업들의 끝이 좋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투자자의 관점을 다시 빌려오자면, 투자를 할 때도 ‘최종 성적은 마지막에 결정된다.’라는 생각을 잊으면 안 됩니다. 아무리 투자의 대가라고 소문이 났어도, 한 번의 잘못으로 명성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전설적인 헤지펀드 LTCM이 바로 그런 사례입니다.

(LTCM에 대한 얘기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써보려고 합니다. 미리 내용을 알고 싶다면 윌리엄 파운드스톤의 “머니 사이언스 (링크)”를 읽어보세요!)

노벨상 수상자들이 만든 데다가, 수익률도 높아 화제였던 LTCM

장기적인 안목은 ‘언제 망할지 모른다’라는 경계심을 일깨우기도 하면서, 동시에 더 중요한 가치에 매달리게 하는 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Amazon의 제프 베조스(링크)인데요, 얼마 전 우연히 본 유튜브 영상에서 보니 쿠팡의 김범석 대표도 long-term strategy라는 일관적인 철학에 기반한 대답을 하고 있었습니다.

출처: 유튜브 <Harris English>
출처: 유튜브 <Harris English>

이 기업들은 그 때 그 때 회사의 상황에 기반해서 의사결정을 하기보다는, 그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에 기반에서 의사결정을 하려고 했습니다. 물론 0과 1 중간 어느 지점에서 최적점을 찾았겠지요.


이렇게 장기적으로 생각하다 보면, 내가 속한 ‘판’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더 긴 시간의 축에서 현재를 해석하다 보면, 더 많은 가능성을 검토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요?

무슨 얘기냐면, 판돈이 100불 짜리인 포커판에서 1등이 될 때까지 버티는 것도 좋지만, 좀 더 멀리 생각해보면 언젠가는 판돈 자체가 더 큰 판으로 옮겨가는 게 더 좋아보인다는 것이죠. 10년 뒤에도 똑같은 판에서 똑같은 사람들과 똑같은 돈을 벌고 있을 거냐, 라고 자문한다면 높은 확률로 ‘아니오’라는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재밌게도 판돈이 높아진다고 해서 포커판에 참여한 선수들의 실력이 반드시 더 뛰어난 것은 아닙니다. Molly’s Game에서도, Molly가 운영하는 포커판의 판돈은 시간이 갈수록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그렇다고 포커판의 참여자들의 실력이 하늘과 땅 차이였던 것도 아니죠.

사업도 조금 비슷한 것 같습니다. 내가 속한 판에서 1등을 하는 것의 RoI보다, 판 자체를 옮기는 것의 RoI가 높아지는 시점이 어느 순간 오는 것 같습니다.

만약 판돈이 1만 원인 포커 판에서 100만 원을 갖고 시작한 사람이 1,000만 원을 벌었다면, 계속 그 판에 남아 몇천만 원을 더 모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1,000만 원을 종잣돈 삼아 열 배 큰 판(판돈이 10만원인 곳)으로 이동하면 1,000만 원을 다시 열 배로 불려 1억 원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지요.


E1이라는 회사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멋진 문화나 브랜드, 높은 인재 밀도로 알려진 회사는 아닙니다.

E1은 가스를 수출입하는 회사인데요, 이 회사의 인당 영업이익이 무려 15억 원(링크)이라고 합니다. 경쟁사인 SK가스도 비슷한 수준이고요.

디어로 따지면 영업이익이 450억 원이라는 얘기입니다. 매출이 아니라 이익 기준입니다! 이 수치는 글로벌 회사들과 비교해도 낮은 수치가 아닙니다. 오히려 훨씬 높습니다.

위의 회사들보다 E1의 인당 영업이익이 월등히 높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요? 위 차트를 보면 회사의 실력에서 오는 차이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산업의 특성 자체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스 트레이딩의 경우 거래 한 건당 거래액이 많게는 수백억 원이고, 그 거래에 관여하는 직원들의 수가 많아야 3~5명 수준입니다. 이렇게 1인당 거래의 스케일 자체가 큰 사업을 하다 보니, 판돈이 큰 포커판에 앉아 있는 효과를 누리는 게 아닐까 합니다.

Credit Suisse 리포트에서 좋은 회사를 고르기 전에 우선 좋은 산업을 고르라고 한 이유가 이런 맥락이 아니었을까요?

어려운 산업에서 똑똑하게 회사를 운영하는 게 똑똑한 게 아니라,
쉬운 산업을 고르는 게 똑똑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스는 수요와 공급이 모두 안정적인 편입니다. 특히 수요는 GDP와 강하게 연결이 되어 있고, 경쟁사의 숫자도 적습니다.

출처: 한국석유공사; 원문 기사 (링크)

디어가 속한 산업은 E1이 속한 산업과 비교해볼 때 어떤 부분이 더 낫고, 어떤 부분이 더 부족할까요?

한편 디어가 속한 판은 포커로 치면 동네 포커판에 가까울까요, 월드 시리즈 오브 포커(WSOP)에 가까울까요?

-->